그믐날 - 김상용
연말이 되니, 외상값이 마마 돋듯 한다. 고습도치는 제가 좋아서 외를 진다. 그러나 그는 심성이 원래 지기를 좋아해서 빚을 진 것은 아니다. 굳이 결벽(潔癖)을 지켜보고도 싶어 하는 그다. 그러나 벽(壁)도 운이 있어야 지키는 것- 한데 운이란 원래 팔자소관이라 맘대로 못하는 게다. 그도 어쩌다 빚질 운을 타고났을 뿐이다.
”이 달을 섣달입니다. 이 달엔 끊어 줍쇼.“ 한다.
연즉시야(言則是也)다. 정월서 열두 달이 갔으니 섣달도 됐을 게다. 섣달에 청장(淸帳)하는 법쯤이야, 근들 모를 리야 있겠느냐?
또한 ”줍쇼, 줍쇼“하는 친구들도 꼭 좋아서 이런 귀찮은 소리를 외며 다닐 것은 아니다. 그들도 받을 것은 받아야 저도 살고, 남에게 줄 것도 줄게 아닌가? 듣고 보면 그들에게도 눈물겨운 사정이 있을 적도 많다. 그러나 손에 푼전에 없을 때 이러한 이해성은 수포(水泡)밖에 될 것이 없다. 정(情)도 그러하고 의(義 )도 역시 그러하나, 현실의 얼음은 풀릴 줄을 모르고 그의 딜레마엔 비애의 구름이 가린다.
”물론 주지. 그믐날 줄 게니 집으로 오소.“ 하였다.
그는 이 순간 감히 물론을 ‘주지’ 위에 붙일 정도로 돈키호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물론’이 전연 영에서 출발한 물론은 아니다. 그도 4년 전에 50원(圓) 하나를 어느 친구에게 꿔준 일이 있었다. 딱한 사정을 듣고 나서, ”무슨 방도로도 그믐께쯤은 갚아드리리다.“ 하는 답이었다. 이것이 그에게 ‘물론’을 내뱉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빚을 얻고 그 빚을 4년이나 못 갚았다면, 그 친구의 실력도 짐작할 만하다. 이런 때의 문제는 실력이지, 성의 유무가 아니다. 들어올 가능성 1에 못 들어올 획실성이 9쯤 된다.
이런 것을 믿다니....... 과연 어리석지 아니한가? 그도 산술 시험에 70점을 맞아 본 수재다. 그만 총명으로 이 믿음의 어리석음을 모를 리가 없다. 말하자면 그는 이 어리석음을 자취(自取)한 데 불과하다.
이런 때 떠내려오는 지푸라기를 안 잡는댔자, 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는‘그믐’이란 안질 환자의 파라채로 빚쟁이들르 쫓아버렸다. 이마를 만져보니 식은땀이 축축하다.
하늘은 선악인의 지붕을 택(擇)치 않고 우로(雨露)를 내려 준다. 게까지는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채(債)의 권무(權務)를 가리지 않고 ‘그믐’을 함게 보내심은 항혜(恒惠)가 지나쳐 원망의 눈물이 흐른다. 마침내 빚쟁이들에게 ‘줍쇼’ 날이 오는 날, 그에겐 주어야 할 ‘그믐날’이 오고 말았다.
이때 기다리는 50원이 나 여기 있소 하면야 근심이 무에랴? 그러나 스무 아흐렛날이나 그믐이 돼도 들어와야 할 50원은 어느 골목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종내 찾아들 줄을 모른다. 그에겐 ”물론 주지! 그믐날 집으로 오소.“ 한 기억이 반갑지 못한 총명 덕에 아직도 새파랗다.
”집으로 오소“ 해놓았는지라, 빚쟁이들이 다행 일터까지는 달려들지 않는다. 평온한 하루 속에 일이 끝났다. 일이 끝났으니 갈 게 아니냐? 제대로 가자면 그믐날도 되고 하니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게다. 그러나 천만에........ 이런 때 집으로 가는 건 맨대가리로 말라리아 모기 둥지를 받는 것과 똑 마찬가지다.
그는 오며오며 만책(萬策)을 생각해 본다. 생각해 봐야 다방 순례밖에 타계(他計)가 없다. 가장 염가의 호신피난법(護身避難法)이다. 그러나 군자(軍資)는? 그는 다 떨어진 양복 주머니에 SOS를 타전한다. 일금 30전야유(錢也有)의 보첩(報牒)! 절처봉생(絶處逢生)은 만고에 빛날 옥구(玉句)디.
그는 다방 문을 연다. 보이의 ”드럽쇼!“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 소리에 대해 모자를 벗지 아니할 정도로 오만하다. 30전 군자는 그에게 이만한 오만을 가질 권리를 준 것이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화보나 들치며, 세 시간을 있어도 여섯 시간을 있어도 당당한 이 집의 손님이다. 그는 우선 거미줄 같은 니코틴 망 속에 무수한 삶은 문어 대가리를 보았다. 그는 우선 거미줄 같은 니코틴 망 속에 무수한 삶은 문어 대가리를 보았다. 그는 그들을 비예(睥睨)하며 가장 점잖게 좌(座)를 정해 본다. 한 푼에 투매되는 샤리아핀의 ‘볼가의 뱃노래’는 그 청취가 과도로 애수적이다.
그는 커피 한 잔을 명하였다. 얼마 아니해 탁(卓) 위에 놓여진다.
”오-거룩하신 커피-ㅅ잔.“하고 그의 기도는 시작된다. 어서 염라대황이 되사, 이 하루를 옭아가 주소서 하는 애원이다. 어쨌든 그의 군자가 핍진(乏盡)키 전에 그는 이날 하루를 착살(鑿殺)해야 할 엄훈하(嚴訓下)에 있다.
겨울밤이 열 시 반이면, 밤도 어지간히 깊었다. 그는 이 사막에서 새 오아시스를 찾노라, 30필의 낙타를 다 잃은 대상(隊商)의 신세다. 그는 지금 가진 것을 다 버린 가장 성결(聖潔)한 처지에 있다.
”지금까지야 설마 기다리랴?“
”지금 또야 오랴?“
비로소 안도의 성(城)이 심장을 두른다. 거리의 찬바람이 휘- 지날 때, 그는 의미 모를 뜨거운 두 줄을 뺨에 느꼈다.
누가 그의 왼볼을 치면, 그는 진심으로 그의 바른볼을 제공했으리라.
문간을 들어서자.
”오늘은 꼭 받아야겠다고 다섯 사람이나 기다리다 갔소.“ 한다.
이건 누굴 숙맥으로 아나, 말 안하면 모를 줄 아나 봐. 대꾸를 하고도 싶다. 그러나 부엌을 바라보자마자 그의 배가 와락 고파진 이때, 그에겐 그말을 할 만한 여력이 없다.
그는 꽁무니를 뒷마루에 내던졌다. 그리고 맥풀린 손으로 신발 끈을 끄르려 한 이때다. 바로 이때다.
바로 이때.
”참 아까, 50언 가져왔습니다.“ 한다.
귀야, 믿어라! 이 어인 하늘의 음성이냐?
이럴 때 아니 휘둥그레지면 그의 눈이 아니다.
자- 기적이다! 기적을 믿어라.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래도 기적이 없다는 놈에게 자자손손 앙화(殃禍)가 내려야 한다. 오! 고마우신 기적의 50원!
열한 시가 다 뭐냐? 새로 한 시 아냐, 세 시라도 좋다.
50원아! 가자, 감금된 청백고결을 구하러. 50원아, 십자군의 행군을 어서 떠나자!
어느 놈이고 올 놈은 오라. 그래, 너희들이 받을 게 얼마냐? 주마 한 그믐날이다. 주다뿐일까, 장부의 일언을 천금 주어 바꿀 줄 아는가?
그에겐 지금 공복도 피로도 없다. 포도를 울리는 그의 낡은 구두는 개선장군의 발굽보다 우렁차다.
S상점의 문을 두드린다. 아무 대답이 없다.
고연놈들! 벌써 문을 닫다니 ....... 받을 것도 안 받고 벌써 문을 닫았어.
고연놈들!
”문 열우.“ 하고 또 문을 두드린다.
”누구십니까?“
한참만에야 문이 열렸다.
”내요. 돈 받으소. 아까 왔더라는걸. 어~ 마침 친구에게 붙들려서 ....... 하하, 친구에게 붙들리면 어쩔 수가 없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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